Page 48 - SJM 50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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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JM 50년사 Section.1 통사 PART Ⅰ. 부품 국산화의 기치를 내걸다
초창기 성진기공 야유회
정도로 협소한 공간이었다. 생산시설은 생산과 설비 시공을 위한 프레스 1대, 선반 2대
등 기계류와 전기용접기, 산소절단기, 파이프머신 등이 전부였다. 직원 수도 사무직과
생산직을 합쳐 7~8명 수준이었다. 소수정예로 꾸려진 조직에서 1인 다역을 소화해야만
했다. 특히 김 사장은 자금 조달은 물론 제품의 설계와 생산, 영업까지 맡아 몸이 열 개
라도 부족했다.
외형적인 규모가 작다고 해서 야망과 도전 정신까지 작았던 것은 아니다. 직원들 모두
내 일처럼 열심히 뛰었고, 젊은 열정을 아끼지 않고 불태웠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벨
로우즈 사관학교이자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갖춘 강소기업의 산실인 성수공장은 그렇
게 가동에 들어갔다. 초창기 직원 월급봉투
설비 시공 발판 삼아 제품 양산체제 준비
공장 부지와 기계설비를 갖추고 난 후 그렇지 않아도 넉넉하지 못했던 운영자금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당시는 금융기관을 통해 사업자금을 융통하기에 매우 어려웠던 시절
이었다. 김 사장은 설립 전부터 자금 조달의 난항을 예측해 일종의 안전장치 하나를 만들어
놓았다. 회사를 창립하면서 사업목적에 건설업(설비 시공)을 넣은 것이 바로 그 일이었다.
냉난방설비 시공의 첫 수주는 1975년 4월 이뤄졌다. 고려합섬 공조설비 공사와 현대자동차
포니 공장 급배수 난방 시설공사, 기타 설비공사를 처음으로 수주했다. 두 설비공사를 마친
후 벌어들인 수익금으로 사업 초기 재정난을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이후 설비공사 수주는
사업이 일정 정도 궤도에 오르기까지 3년여 동안 성진기공의 든든한 버팀목이 됐다.
성진기공은 설비 시공과 함께 제품 생산을 본격적으로 준비했다. 회사 창립 이전에 벨 벨로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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