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0 - SJM 50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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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JM 50년사                                                                                      Section.1                         통사                                                                             PART Ⅰ.  부품 국산화의 기치를 내걸다





            아버지는 기회가 닿을 때마다 규칙적이고 절제된 생활을 강조했다. 평소 입버릇처럼 말

            했던 “하나님을 경외하고, 나라와 가족을 사랑하며 부모를 공경하라”라는 말은 곧 가훈
            이 됐다. 결혼 후 일본 와세다 전문학교로 유학을 떠나 3년 정도 공부한 아버지는 일찌

            감치 서구화를 체득한 신지식인이기도 했다.





                           아버지는 자연의 섭리와 인간의 도리를 가르쳐주었던 선각자였습니다. 아버지께서 남겨준 정신적 유산은 어려

                           움이 닥치거나 뿌리치기 쉽지 않은 유혹 앞에서 버틸 수 있는 힘이 돼주었습니다. 아버지는 삶의 나침반이자 인
                           생의 참 스승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일본 유학시절을 떠올리며 다음 세대는 엔지니어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누차 강조
            했다. 정암을 엔지니어의 길로 안내한 것도 인생의 스승이었다. 아버지는 어린 아들의 총명
            함과 엔지니어로서의 자질을 일찍부터 알아보고 각별한 애정을 쏟았다. 아버지의 아들에 대

            한 신념은 확고했고, 아들 역시 아버지를 믿고 따랐다. 아들은 어렸을 때부터 ‘내가 할 일은
            기계공학’이라고 생각하며 자랐다.

            서울 아현동에 가족의 보금자리를 마련했던 시절, 아현초등학교에 다닐 때의 일이었다.
            아현초등학교와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우리나라 3대 공업학교 중 하나인 경기공업고등
            학교가 있었다. 아버지는 아들이 당연히 경기공업고등학교에 진학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집안이 부유하지 못한 대신 똑똑한 학생들은 대개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공과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엘리트 코스처럼 여겨졌던 시기였다. 정암은 경기공업고등학교에 입학한

            후 기계공학도의 꿈을 키워나갔다.



            대학에서의 첫 번째 ‘사업’ 교재 만들기
            정암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1957년 한양대학교 기계공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격동기

            의 사회적 분위기와 어려운 가정 형편 등이 맞물려 대학 1학년 동안 방황의 시간을 보
            냈다. 한 해가 바뀌고 새 학기 등록금을 낼 형편이 안 돼 친구 다섯 명과 입대를 약속했
            다. 그때 정암만 대학에 남고 친구들은 군대에 가는 일이 생겼다.

            좀처럼 학업에 열중하지 못했던 정암의 마음을 다잡아준 은인은 상공부 산하 한 공업연
            구기관에서 연구원으로 있던 손명환 교수였다. 대학 실습생의 재능을 알아본 손 교수는

            교재 만드는 일을 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군대 갔다 오면 공부하기 더 어려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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