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9 - 수산가족 2025 SUMM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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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문종필 만화평론가
일을 하다 보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어디든 떠나고 싶다. 그럴 때는 친한 동료나 가족과 함께 가까운 바닷가를 찾아가
보는 것이 좋겠다. 많은 시간을 할애해 머무르지 못하더라도 두세 시간 정도 해변을 걷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여유도
허락되지 않는다면, 시원하고 안락한 ‘방구석’에서 잔잔하고 따뜻한 만화나 화려한 액션 만화를 읽어보면 어떨까. 잠시
라도 답답한 마음을 저 멀리 흘려버릴 수 있지 않을까.
마음처방 둘
기계전사 109
김준범
최근에 복간된 김준범의 〈기계전사 109〉는 기계와 인간의 충돌을 다룬다. 기술이
현격히 발전된 사회에서는 기계와 인간이 동등한 조건에 놓인다. 사고하는 것을
넘어 냄새를 맡고 가슴 아파할 줄도 안다. 다가올 미래에 정말로 이런 세상이 펼쳐
질지는 모르겠지만, 이 작품은 이런 ‘세계관’에서 기계와 인간의 이야기를 다룬다.
온화한 서사가 아닌 기계와 인간의 불협화음이 담긴다. 하지만 이러한 서사는 특
별한 것이 아니다. 인공지능 시대에 이런 내용의 영화나 드라마나 소설이나 시(詩)
는 넘쳐난다. 그런 점에서 김준범의 〈기계전사 109〉는 독특하다고 볼 수 없다. 그
러나 이 작품이 특별한 것은 인공지능 시대에 창작된 최근 작품이 아닌, 1989년
12월 《아이큐 점프》에 오랜 시간 연재됐으며, 1994년에 단행본으로 출간된 만화
라는 점이다.
이 작품은 오래된 작품이다. 하지만 36년 전 작품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더 유익한 것들이 있다. 하나는 인공지능이 유행
하는 시기에 그려진 ‘안드로이드’와 그렇지 않은 시대에 그려진 ‘안드로이드’의 차이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이야기도 축적된 서사를 바탕으로 진보한다는 점에서 신작 작품과 비교해 〈기계전사 109〉가 아쉬운 점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동시대와는 반대로 인공지능이 유행하지 않는 시대에 그려진 안드로이드는 그것 나름대로 매력을 품고 있다. 그
런데 놀라운 것은 이 작품과 동시대의 작품이 전하는 메시지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바로 안드로이드가 인간에
의해서 짓눌린다는 것. 이는 인간이 품고 있는 혐오와 편견이 ‘기계 인간’이라는 가상 존재를 통해 재현된 것이다. 이러한
메시지는 2025년 지금이나 이 작품이 발표되던 1989년이나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이런 차이를 느끼는 것도 하나의 즐
거움이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느낄 수 있는 또 다른 유익한 점은 이 만화의 마지막 장면에 응축되어 있다. 안드로이드가
사랑하는 존재를 잃어버릴 때 목격한 “2100년 5월 18일 나의 사랑 셰어”라는 목소리가 그것이다. 그러니까 이 만화가 쓰
인 1989년은 그 당시 1980년 광주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이유로 기계에 대한 인간의 폭력은 은유적인
형태로 작품에 재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앞선 두 편의 작품은 사실 여행이나 휴가와는 거리가 있다.
하지만 작품 속에 담긴 여러 감정과 추억, 은유 등을 느끼다 보면
이미 완벽한 ‘방구석 휴가’가 완성된 게 아닐까?